1.잭슨홀은 미국 와이오밍주의 국립공원 안에 있는 작은 타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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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정구역상 정식 이름은 잭슨인데, 미국 초기에 이곳에 들어온 여행자들이 평지를 가파른 경사의 계곡들이 둘러싸고 있어 구멍에 푹 빠진듯한 느낌이 든다고 잭슨홀로 부르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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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잭슨홀은 미국 재벌 록펠러가 주변 산지 대부분을 사들여서, 자연상태를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시에 기부를 하는 바람에 개발에서 제외되었고, 중심가라 해봤자 아래와 같이 미국 시골 수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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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78년 미국의 14개 연방은행중의 하나인 캔자스시티 Fed는 은행가, 정책전문가,학자들을 초청해서 경제정책심포지움을 개최하기 시작함.
5. 주로 교통이 좋은 캔자스시티나 덴버에서 심포지움을 열었지만, 관심을 끌지 못해 인기가 없었음.
6. 캔자스시티 Fed는 심포지움의 흥행을 위해, Fed 의장인 폴 볼커를 초대하려고 노력함.
7. 당시 볼커는 미친 듯이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사상 유례없는 고금리 정책을 펼치고 있었음.
8. 1971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는 35달러당 금 1온스를 교환해 주는 금본위제를 하고 있었음.
9. 월남전으로 막대한 전쟁비용이 발생함.
10. 금은 늘어나지 않는데, 전쟁비용으로 달러를 마구 찍어내는 것을 보는 프랑스 등 몇몇 나라는 정말 미국에 달러를 바꿔줄 만한 금이 있을지 의문이 생김.
11. 미국 달러를 돌려줄 테니, 약속한 대로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함.
12.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은 금과 달러 교환을 못해주겠다고 선언하며 금본위제를 포기하였고, 이것을 닉슨 쇼크라고 부름.
13. 닉슨쇼크 이후 금 1온스의 가치는 35달러에서 1,000달러까지 올라감. 다르게 말하면 미국 달러 가치가 1/30 토막이 난 것임.
14. 달러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물건 가격인 물가가 올라간다는 것임.
15. 당시 연준 의장은 닉슨의 충실한 개였음. 닉슨은 재선이 필요했고, 재선을 위한 부양책이 필요했음.
16. 기준금리를 올리며 긴축을 하는게 아니라 기준금리를 인하하며 양적완화를 시작함.
17. 여기에 중동이 단합해서 기름가격을 올리는 오일쇼크까지 와서 유가는 4배나 오르고, 곡물가격도 올라가기 시작함.
18.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실각하고 카터 정부가 들어섬.
19. 폴 볼커가 구원투수로 연준 의장에 오름.
20. 물가를 잡으려면 당장 보이는 인플레뿐만 아니라, 앞으로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기대 인플레까지 죽여야 함.
21. 폴 볼커는 성장을 포기하고 인플레에 올인하기 시작함.
22. 일단 금리를 단 하루에 11.5%에서 15.5%로 4%p를 올림.
23. 요즘 연준이 0.25%p를 올리다가 0.5%p를 올린다고 빅 스텝이라고 하고, 0.75%p를 올린다고 자이언트 스텝이라고 하는데, 폴 볼커는 4%p를 한방에 올린 것임.
24. 실업률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주식시장도 폭락이 시작됨.
25 결국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함.
26. 다음 대통령은 레이건 이었음.
27. 재선 실패 우려가 있다는 참모들의 조언에도 레이건은 연준에 터치를 하지 않는 기조를 유지함.
28. 폴 볼커는 금리를 더 올려버림
29. 레이건이 되면서 금리가 왠만한 연체이율보다 높은 21.5%까지 올라 감.
30. 금리가 엄청 오르자 대출 이자를 낸다고 물건 살 돈이 줄어들며 경기가 박살 남.
31. 장사가 안되니 미국 중소기업의 40%가 망했고, 대기업도 대출받아서 투자를 해봤자 이자 내면 남는 게 없다고 보고 투자를 포기함.
32.실업률도 10%를 넘기 시작하며, 미국 제조업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임.
33. 미국 기준금리가 올라가니, 제조업은 폭망했지만, 비싼 이자를 노리고 해외에 나가있던 달러가 미국으로 돌아 옴.
34. 미국의 금리 떡상은 1981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함.
35. 은행 예금이자가 높으니 주식이나 해외에 나가있던 돈들이 미국 은행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임.
36. 기준금리가 21.5%까지 올라가니, 은행에 예금만 해도 고수익이 생기는 것임.
37. 시중 유동성이 은행으로 들어와 줄어드니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함.
38. 인플레이션율이 1980년의 14.6%에서 1981년 9%로 꺾였고, 1982년에는 4%로 낮아지기 시작함.
39. 인플레이션은 꺾이기 시작했지만,기업이 망하며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고금리 빚에 고생하던 때가 1982년 이었던 것임.
40. 캔자스시티 Fed는 바로 이때 ‘인플레 파이터’ 볼커와 고금리 정책에 반대하는 경제학자가 경제정책 심포지움에서, 치열한 논리 싸움을 한다면 흥행이 된다고 봄.
41. 문제는 볼커가 초대를 받아도 올것인지 여부였음.
42. 캔자스시티 Fed가 낸 아이디어가 송어 낚시 였음.
43. 볼커는 송어 낚시광 이었음.
44. 캔자스시티 Fed는 행사 장소를 도시에서 송어 낚시를 즐길수 있는 잭슨홀로 바꾸고 볼커를 초대함.
45. 송어낚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볼커는 잭슨홀 미팅에 참석했고, 볼커의 등장으로 잭슨홀 미팅은 세계 경제의 초첨이 됨.
46. 볼커가 온다고 하니,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들이 몰려왔고, 저명한 경제학자들도 초대를 수락하며 흥행 뿐만 아니라 내용도 알차지게 된 것임.
47. 볼커의 잭슨홀 미팅 다음해인 1983년, 인플레이션은 2.4%까지 떨어짐.
48. 인플레가 잡히자 미국은 긴축을 풀고 경기 부양을 다시 시작함
.49. 미국의 장기 호황이 다시 시작됨.
50. 1980년 817포인트까지 내려갔던 다우지수가 1983년 3월 1,130포인트까지 상승했고, 1987년 1월 8일에는 2,000선을 돌파함.
51. 볼커가 유발한 국제적 금융 긴축은 소련의 경제 상황에 치명타를 가하면서 소련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함.
52. 금융 긴축은 미국이 소련과 양강이 아닌 세계 원탑 초강대국으로 올라서게 만든 계기 중 하나로 평가받음.
53. 반면 금리를 인상하니, 중남미와 동유럽, 아프리카 상당수 국가들의 달러가 전부 미국으로 회수되면서, 국가 부도가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함.
54. 잭슨홀 미팅을 하는 회의장은 크기가 크지않고, 소수정예 참석자들간에 원활한 토론을 유도하기 위해 기자들의 초대도 최소한도로 제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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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초대 대상을 100명 이내의 각국 중앙은행장급과 정부요인, 노벨상급 경제학자로 제한 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데리고 오는 수행원들이 많다보니, 1년중 잭슨홀 미팅이 열리는 시기의 잭슨지역 호텔들은 숙박비가 20배 가까이 올라감.
56. 2021년 잭슨홀 미팅에서 파월 연준의장은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인것이라고 판단하고 강조하는 바람에 연준은 적절한 금리인상 타이밍을 9개월이나 늦추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됨.
57. 파월로서는 2021년 잭슨홀 미팅이 지우고 싶은 인생최악의 흑역사가 된 것임.
58. 빌 더들리 전 뉴욕연은 총재는 월스트릿 저널 기고문을 통해 파월의 흑역사를 들추며 2022년 8월 25~27일 열리는 잭슨홀미팅에서 세가지를 천명해야 한다고 주장을 함.
1) 견딜수 없을 정도의 높은 인플레이션 모멘텀이 여전히 건재하다는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2) 연준은 2%의 인플레이션 목표가 달성되고 충분하게 유지될때 까지 긴축적 통화정책을 계속 할 것이다.
3) 긴축의 속도가 아니라 긴축의 출구(최종금리,terminal rate)가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을 확실히 천명하라.
59. 이번 잭슨홀 미팅에서 파월은 빌 더들리가 주장한 내용을 거의 수용하는 발표를 함.
60. 일단 파월은 연준의 결심을 잭슨홀 미팅에서 강하게 보여주는데는 성공한 듯함.
61. 문제는 증시임.
ps) 잭슨홀 미팅은 각국 중앙은행장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미팅 이라고 함. 쇼핑할 곳도 놀거리도 없는 시골에 부부동반이 원칙이라서 그럼.